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공간이 낯설기 그지없다. 통용되던 빛과 어둠의 정의는 단 한 가지 색으로 감싸여 사라지고 반듯하게 오려내 겉모습을 흉내 낸 구조물이 건물의 역할을 대신한다. 본래의 세계라면 비상용으로나 쓸 외벽 계단의 끝, 지붕과 이어지는 층계의 넓지 않은 공간에 두 인영이 점처럼 찍혀있다. 끝으로 오르지도, 아래로 내려가지도 않은 채 경계에 자리 잡은 둘은 무결한 공간의 이물질이 되어 백색의 공간을 구분 짓는다. 원치 않게 초대받은 이방인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얼마 없었고, 발걸음을 옮겨봤자 타의 혹은 자의로 그은 선을 벗어나지 못한다. 내던져진 곳이 달라졌다 해도 변한 건 없다. 이질감이 착각이라 외치듯 결국 모든 것이 제자리였다.
"…라울, 나는."
"나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아무것도…’, 숨이 섞여 평소보다 불분명한 문장을 내뱉는다. 루 프림로즈는 뒤늦게 제 실책을 깨닫는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홀로 짊어진 채 아무것도 내보이지 않으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고, 이타를 가장한 이기로 이해를 바라지 않아야 했으나 감히 바랐다. 아주 오래전 심장에 박힌 파편과 여전히 구멍으로 남아있어 형태가 분명한 흔적을 더듬는다. 입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는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가 어떤 방식으로 굴러가는지 모르지 않는다. 건네주되 돌려받지 않겠다는 건 침범을 허용하지 않는 친절과 다를 바 없는 단절의 일종이지 않나, 언제 든 건지 모를 좋지 않은 습관을 새삼 깨닫는 제 꼴이 우스워 실소가 샌다.
입안이 말라 그 무엇도 꺼내놓지 못한다. 그간 내뱉었던 말과 자신의 인식 간 모순이 쓰다. 의식이 과거를 끄집어낸다. 엉킨 실타래를 더듬어 형상을 상기하면 늘 같은 위치에서 손가락이 걸린다. 그 누가 자신을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무엇을 기대하고 돌려받을 수 있는가? 어릴 적부터 저를 보아온 가족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데, 함께 짐을 나누리라 약속했던 배우자조차 견디지 못했는데, 같은 업을 짊어지고 있는 이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시나리오의 배역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되는 역할, 알파벳과 숫자로 나뉜 등급과 랭크, 그나마 편히 있을 곳을 유지하기 위해 그 체제 속에 적극적으로 편입되는 길을 택했으면서도 녹아들기는 싫어 부러 상처를 건드리고 무른 상태로 두는 짓을 누가 이해하는가. 루 프림로즈는 이미 잃어버린 보통의 삶과 평범한 기준에 대한 편벽이 제 주변 이들에게 어떤 상처를 주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그러지 않고서는 살 수 없어 몇 번이고 무뎌진 자신을 죽이고 일어섰다. 잃어버린 부분도 제 일부로 받아들이며, 다른 이들의 상실을 막고 희미한 만족감과 알량한 효용을 느끼며 몇 번을 무너지더라도 근근한 위로로 살아왔다. 홀로 자신을 다독이고 유일하고 온전한 스스로의 편이 되어 이런 삶도 나쁘지 않다고, 잃지 말아야 할 한 가지만은 지키고 있으니 괜찮다고 읊조리며 살아왔다. 타인에게 기대하는 것이 적다 해도 이미 스쳐 지나간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은 막을 새도 없이 제게 남았으니, 그만으로도 괜찮다고, 비슷하게 돌려받지 않아도 온기를 느낄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 괜찮다고. 제 손에 온전히 주어지는 게 없을지언정 끝없이 스스로를 넓혀가면 결국 끌어안는 총량은 늘어나기 마련이니, 이리 성긴 형태로도 괜찮다고. 그리 믿었는데, 갑작스레 다가오는 물음이 말문을 막는다.
정녕 바라는 것이 없는가?
루는 그에게 이해와 인간성을 바랐다. 스스로가 거북해하고 정을 못 붙이던 다른 헌터들을 떠올리며 예외가 있기를 바라며 끊임없이 무리한 요구를 쏟아냈다. 그리하여 그 이면이 보였을 때, 저와 비슷한 불호를 발견했을 때, 그 틈이 달가워 지금껏 놓지 못하고 여기까지 끌고 왔다.
그러나 이건 라울 보아르네가 아닌 어떤 표상의 이야기다. 인간을 물화하는 방식은 다양하고, 사람들은 누구든 부품이 되는 일을 꺼리지만, 체제뿐만 아니라 다양한 수단으로 인간은 흐려진다. 어떤 상징으로, 집단의 형상으로 여겨지는 순간 개인과 개인의 이야기는 아무런 소용이 없어진다. 루는 스스로가 라울을 그리 여겼다 생각한다. 거부감을 느끼고 멀리하던 헌터들 중 하나로, 어떤 예외의 ‘사례’로, 회복의 수단으로, 가장 싫어하는 방식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지지 않기를 바라고 다치지 않기를 바라며 희망을 얻었다. 여태 자라지 못한 어린 시절의 손으로 그를 붙들고 아직 풀어내지 못한 응어리를 녹여냈다. 저를 약하게 만드는 만큼 있는 힘껏 붙들어 그리 이용하고자 했다.
사고가 여기까지 치달으면 루 프림로즈는 다시금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라울’에게 바라는 것이 없는가?
울렁이는 속을 가다듬는다. 느리게 목울대가 움직인다. 혀끝에 맺힌 말이 구체적인 언어가 되기 전에 삼켜낸다.
“…바라지 않아.”
짤막한 선언, 형태를 갖추기 전 억누른 욕망. 어쩌면 당연하였으니 구태여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내뱉을 필요가 없다. 의미 없는 말은 지워내고 공백을 남긴다.
단지 생을 바란다고, 죽지 못해 사는 것이 아니라, 보다 다채로운 것들로 삶을 채우며 살아가기를 바란다고 어찌 말하겠는가, 누군가에게는 당연하게 주어졌을 것을 바란다 말하는 일은 늘 그를 지치게 했다. 더군다나 그의 앞에 있는 이는 생을 연명한다 하면서도 쉽게 당하지는 않겠다 하였으니, 필요하지 않을 말을 덜어낸다. 이어지기만 한다면 언제든 기회는 있을 터다. 가장 약할 때, 이어 나가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때 짐을 얹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늘 가다듬은 채 내보이던 정돈된 낯은 온데간데없고 말과 따로 노는 시선이 미련을 남긴다. 들쑤신 틈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깊은 골을 만들어낸다. 괜찮지 않을 걸 안다면서도 그만두지 않았다는 말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제 죄를 더할 뿐이라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눈앞의 남자는 이기적이라면서도 객관적으로 구는 버릇을 버리지 못해 자신을 찌를 냉랭한 평을 내어놓는다. 그런 말이 듣기 싫어 푸른 회색 머리칼이 숙여진다. 아래로 향한 낯을 조심스레 받치고 그 위로 이마를 얹었다. 짧게 숨결이 닿고, 떨어진다. 배신감에 떠올랐던 침전물이 가라앉고 미온한 온기로 이색의 눈을, 괴로움을 마주한다. 마찬가지로 편치 않아 일그러진 낯이 답지 않다. 하나, 둘, 셋, 속으로 몇까지 숫자를 세었을까. 트여있으나 내뱉는 바 없는 입에 시선이 머물기를 한참. 흉 진 낯에서 제 손이 떨어지면 루 프림로즈는 그제야 고개를 든다. 아무것도 놓지 않은 채.
"마음 같아서는…"
‘부드럽고 연한 것만 발라내어 입에 넣어주고 싶은데,’ 실소와 함께 목소리에 장난기가 묻어난다. 뭐가 그리 즐거워 놀리고 싶은 건지,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그래서는 안 되는 거잖나…"
"길을 찾는 법은 나도 모르고, '완성' 역시 어떤 것인지 몰라.“
그는 한평생을 헤매며 살아왔다. 목표는 있었지만 달성 여부는 자신에게 달리지 않았고, 제 몸뚱이와 정신조차 통제하기 어려워 수도 없이 바스러졌다. 완벽과는 거리가 먼 생이었으며 걸어가는 곳이 길이었고, 수없이 의심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다. 여즉 결론에 다다르지 못했으니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옳은지, 그른지도 알 수 없다. 그러니 그가 길잡이가 될 수 없다는 건 분명하다. 라울 보아르네의 완성과 완벽에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것 역시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적어도 같이 헤매줄 수는 있지.“
붙들린 손을 조심스레 마저 내린다. 숙인 채 눈을 감은 면을 가리는 것이 없어진다. 그의 고개가 숙여지고 마찬가지로 눈을 감는다. 서로 다른 색의 머리칼은 퍽 대비감이 짙으나 아주 다른 색은 아니다. 그 누구도 극단에 닿지 못한 채 뒤섞인다.
"그건 내게 익숙한 일이고,"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니.”
속살거리는 목소리가 꾸며낸 것 없이 한껏 가라앉아 바닥에 붙는다. 능숙한 가장으로 띄우지 않은 목소리는 친근함과 거리가 멀다. 물증 하나 남기지 못하는 소리가 흩어지고, 말뿐인 선언이 남는다. ‘당신, 눈 떠봐.’ 꼭 다시 악몽 속에 파묻힐 낯을 한 남자에게 익숙할 언어가 닿는다. 더는 홀로 깨지지 말라고, 편하다는 이유로, 다른 길이 보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같은 선택을 하지 말라고, 수많은 부탁을 삼켜내는 대신 그는 제안한다. 비록 영원을 약속할 수 없고 그럴 수도 없지만 적어도 이정표 하나 없는 황무지가 익숙해질 때까지, 잠시나마 곁에 머물겠다는 약속과 함께.
"라울, 그래도 무섭나?"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고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