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초여름 볕 좋은 날에…
장난감 비행기를 따라 밟을 때마다 풀 내음이 퍼지는 잔디밭을 지나면 현관을 통과하고 주방 문지방에 다다라 비행기가 떨어진다. 어른들은 애들끼리 놀라며 풀어 두고 식탁에 앉아 한가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식 공부 봐주는 조카의 편리함과 요즘 아이스 캔디 수익은 얼마고, 조카 생활비 명목의 두 배로 들어온 돈 같은 일상적이고 시답잖은 이야기들. 어렸던 날엔 당장 이해하지 못 했으나 뜻도 모르고 흔적만 남은 기억들은 몇 년이고 얼룩져 있다, 머리가 차고 결국은 어떤 색이 물들었는지 깨닫는다. 13살 라울 보아르네가 끝나지 않을 결함을 인지한 순간이었다. 그즈음부터 정답만을 고집하며 감정은 성장을 멈추기 시작했고, 여전히 미숙한 채로 남았다. 이 아이 하나가 언제나 안에 있어서, 혼자 남을 때면 투정을 부리거나 허전한 공간에서 우울함에 잠기곤 했다. 아이는 짧은 순간 길 너머의 다른 아이도 바라본다. 둘 다 뭐가 그리 절박한지, 쥔 것이 구겨지도록 두 손은 다물려 있어 손을 맞잡지는 못 했다.
의심 많은 이는 바라지 않는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말이 나오기까지의 빈 곳들은 침묵으로 차 있었고, 둘 사이를 지나는 묵언은 언제나 눌러 담은 언어가 가득했으니. 이제는 그를 알기에 남자의 대답에서 한 문장보다 더 많은 단어들을 듣는다. 일전 남자가 제게 바라는 것들로 한참을 괴로워했으니 모를 턱이 없었음에도 말을 않는다면, 저만큼이나 숨기고 싶은 면이 많은 사람에게 캐묻는 대신 모르는 척 하기를 택하고 네가 원하는 대로 비워 들었다. 완전히 이해하지 못 할 이유가 변함없이 차 있을 터라 제 머리로 가늠만 했다. 받아들일 수 없어 거부감을 느꼈던 요구를 지나고, 겨우 제 안의 그리움을 인정하고 찾게 된 작은 온기로 이어진 족적을 밟는다. 생명이 태어나며 갖는 체온은 냉정을 표방한다 해서 태초부터 없었다 부정할 수는 없으므로 본능이 따른다.
남자는 인정하지 않을 지 몰라도, 자라지 못 한 아이가 보기에는 만지고 싶도록 따스해 보이는 햇살이었다. 쥐었던 손을 펴면 깨진 조각들이 있다. 예리함을 감수하고 여린 손바닥이 찔리도록 간직했던 파편들. 인간은 살아가며 수없이 조각나고 이제는 붙일 수 없음을 받아들인다. 그러면, 더는 필요 없어진 부서진 것들을 흘려보내고 빈손을 뻗을 수 있었다. 아이의 손이 펴지지 않아도 그 위로 얹을 수는 있었다.
부러 꾸미지 않는 낮고 안정적인 목소리에 조심스레 눈을 열었다. 어느 곳도 비어있지 않은 무게감 있는 마디였다. 당장 무너질 듯했던 심정은 여태 붙들린 손에 지탱해 서 있었다. 떨리는 시선은 피할 곳을 찾지 못해 갈색도, 녹색도 아닌 눈을 맞춘다. 차라리 비난하고 질책하면 제 마음 하나는 편할 텐데도, 종내에 같이 방황하겠다는 말을 건네는 게 정말 당신다워 참지 못하고 작은 웃음이 흘렀다. 표정을 숨기다 내려간 손에 닿은 손가락을 엮어 풀리지 않도록 깍지 껴 잡는다. 조였던 맘이 풀리고 분명 불지 않을 바람이 통한다. 이번에도 당해내지 못 할 것이다.
“ 결국은 증명하는구나. 네 방식을. ”
“ 당신처럼 고집 센 인간 처음 봐…. ”
안심이 되면 탈력감이 찾아와 단단한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닿아 있으면 점차 느껴지는 온기와 섬유에 배인 일상적인 냄새가 흔들리던 마음을 가라앉힌다. 숨을 고른다. 로보로서 호흡하던 공기를 갈무리하고 더는 쓰지 않을 부분을 조금씩 잘라 흘려보낸다. 같이 헤매어줄 남자에게만 닿도록 중얼거리는 작은 소리가 들린다. 굳이 같이 있을 필요가 있느냐며 가벼운 투덜거림이 지나고…
“ …무섭지 않은 지는 모르겠어, 아직. ”
그러니……
“ …루. ”
“ 절대로 내 손 놓지 마…. ”